들어가며

 2025년 여름, AI 디지털교과서가 '디지털 교육자료' 로 격하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한때 국가 차원에서 큰 기대를 모았던 사업이 제도적으로 다른 위상을 갖게 되면서, 저 역시 이 프로젝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024년 한 해를 휴일도 없이 거의 매일 밤을 새며 고생한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교육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에 제게는 이 프로젝트가 정말 소중했습니다. 기획자로서 참여했던 과정과 숫자로 드러난 성과, 그 안에서 마주했던 장애물, 해결의 과정, 그리고 개인적으로 배운 점을 정리해두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지난 일을 회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같은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면 어떻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도 함께 고민해보고자 이 글을 씁니다.

 

 

 

 

 

프로젝트의 배경

 정부 주도의 AI 디지털교과서(디지털 교육자료, 이하 AIDT로 기술) 사업은 국가 차원에서 정말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동시에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가득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를 스캔한 디지털 교과서라는 아이템은 있었지만, AI 기술을 접목한 교과서는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케이스입니다. 일반적인 정부 지원 사업도 아닌, 미래 세대를 이끌어나갈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사업 시작 전부터 기대하는 목소리와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저는 개발사 입장으로, 이미 교과서 사업을 하고 있는 출판사와 협약을 맺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공교육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도 소통해야 했습니다. 특히 검정(인증) 시스템은 요구사항이 자주 바뀌고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기획자로서 많은 도전 과제가 있었습니다.

 

 

 

 

숫자로 돌아보기

 제가 함께한 개발사는 20명 규모의 작은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기획자는 경력 20년 이상의 시니어 기획자와 저, 2인 체제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팀이었지만, 그만큼 주도적으로 기획 전반을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팀 규모였기에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바로 작업할 수 있는 가이드가 필요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부터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와이어프레임과 목업 디자인을 직접 제작해 디자이너와 협업했고, DB 구조와 정책을 설계해 개발팀이 엔지니어링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산출물을 마련했습니다.

 

기능 정의서와 정책 문서를 정말 많이 작성했습니다. 아마 500장 이상일 것 같습니다. 피그마 와이어프레임으로 전달했던 디자인 프레임은 150장 이상이 나왔습니다. 한 교과서당 40개 이상의 DB 테이블을 설계했는데, 8개 교과서를 발행했으니 320개 이상의 데이터 테이블을 설계했네요.

 

AIDT의 1차년도 심사에서는 총 146종이 제출되어 76종만 합격하며, 평균 합격률은 약 52%에 그쳤습니다. (관련기사) 1차년도에 저희 개발사와 출판사에서 준비한 교과서는 100% 로 통과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현재(25년 9월)까지 17개월을 보냈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정부 기관 담당자들을 서너 번 만났고, 출판사 임원진 그리고 실무진과 매주 협의했습니다. 현직 교사 40명과 네 차례 만남을 가졌고, 시각·청각·운동·인지 장애가 있는 교사들도 두 차례 직접 인터뷰했습니다. 서울, 경기, 대구, 부산, 제주 등 전국을 다니며 초·중·고등학교 다섯 곳을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의 경험은 다른 담당자들이 업무를 이어갈 수 있는 선례가 되었습니다. 결국 총 30곳 이상의 기관·학교·이해관계자와 협업하며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교과서가 합격하며 회사에도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매출은 7억 6,900만 원에서 22억 9,239만 원으로 약 198% 성장했으며, 영업이익은 –2,457만 원 적자에서 8억 9,771만 원 흑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어려웠던 점과 장애물

불확실한 기준 속에서 '검정 탈락'은 곧 사업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매 기능과 정책이 심사 기준을 충족하는지 끊임없이 검증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합격하여 학교에도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사에도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명 출판사가 검정에 탈락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영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정부 주도 사업은 특성상 요구사항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담당자마다 해석이 달라 의사결정이 번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획자는 그때마다 다시 기능 정의서와 화면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하고, 이는 개발 일정에도 직결되는 부담입니다. DB 설계를 변경하면 콘텐츠를 전면 수정해야 할 수도 있고, 출판사와도 리소스를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주제입니다.

 

출판사, 개발사, 정부 기관도 서로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저는 기획자로서 서로 다른 언어를 통역하듯 조율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출판사는 콘텐츠의 질을 강조하고, 개발사는 구현 가능성을 따지며, 정부는 형식적인 요건 충족에 집중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도 있습니다. 저는 사수로 모셨던, 20년 이상의 경력 기획자 선배님 덕분에 실질적인 것들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설계 단계에서는 실제 교사와 학생들이 어떤 맥락에서 교과서를 사용하는지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결국 직접 초·중·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사를 인터뷰하며, 실제 수업 환경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는 기획 방향을 수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서비스를 설계하고 운영하며 제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 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서비스 기획자는 언제나 서비스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장애가 있는 사용자에 대한 접근성 기획은 그동안 거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시각·청각·운동·인지 장애가 있는 교사들을 만나 두 차례 의견을 수집했지만, 한정된 리소스 속에서 얼마나 깊이 반영할 수 있을지는 늘 고민거리였습니다.

 

 

 

프로젝트를 마치며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IT 솔루션 하나를 출시해낸 경험이 아닙니다. 매출과 영업이익을 끌어올린 숫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의 수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배운 경험이었습니다.

 

서비스 기획자 실무 관점에서, 여러 요구사항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제1 지표는 '검정 기준' 이었습니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습니다. 돌이켜보면, "검정을 통과하는 것" 자체보다도 "교사와 학생이 수업 현장에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서비스" 를 만드는 것이 진짜 목표였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성과와 수익일지 모르지만, 정작 이 서비스를 실제로 사용하게 될 교사·학생·학부모가 기대하는 바는 다릅니다. 저는 AIDT를 통해 교사가 교수·학습을 더 편리하게 설계하고, 학생이 자신의 역량에 맞춰 맞춤형 지원을 받으며 재미있게 학습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나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교육 격차를 줄이고, 학생이 전학을 가거나 진급을 하더라도 연속성 있게 학습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다면

만약 이 프로젝트를 다시 맡게 된다면, 초기부터 더 다양한 연령대와 지역에 속한 교사와 학생들의 의견을 수집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제가 기획해 출시한 서비스는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비장애인에게 최적화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안으로 작은 글씨를 보기 힘들어하는 장년 교사, 한국어 설명을 충분히 따라가기 어려운 다문화 배경의 학생, 학습 분위기가 열악한 지역의 교사, 성실하지만 성취가 더딘 학생 등 다양한 상황을 좀더 디테일하게 고려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지역별 교육 격차였습니다. 예를 들어, 중학생 과정의 영어 문법을 가르치는데도 반의 절반 이상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비수도권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도 있었습니다. 수도권에서만 공부하고 일해온 저에게는,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획 과정에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개발 및 테스트도 할 수 있었다면, 검정에 통과될 수도 있었다면, 그렇게 했다면 더 보편적이고 현장 친화적인 서비스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운 점

저는 개발자 출신의 기획자로서, 개발자들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DB와 정책 설계에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와이어프레임과 목업 제작 능력도 스스로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와의 협업에서도 효과적인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가장 좋은 기획은 "개발과 디자인 모두가 일하기 좋은 기획"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저에게 더 필요한 역량은 불확실성과 변화에 대응하는 기획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효율적이고 깔끔한 기획서를 잘 작성하더라도, 요구사항이 바뀌면 다시 처음부터 설계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되고, 팀원들의 피로도도 커졌습니다.

 

앞으로는 단순히 제품 완성도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 자체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획 방식과 협업 구조를 고민하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팀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기획자가 되고 싶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