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AI 쓰면 금방 되잖아요

요즘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그리고 난 이 말을 듣는게 내심 불편하다. 왜 그럴까 오래 생각해봤는데, 단순히 무시당하는 기분이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말 안에는 두 가지의 무지가 들어있는 듯하다. 상대방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것, 그리고 AI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것.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결정해버리는 태도. 이것이 내가 괜히 꽁기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몇주 전, 클라이언트와 킥오프 미팅을 하는 자리였다. 프로젝트 WBS 일정을 논의하던 중, 클라이언트 측 담당자가 말했다. '사용자 인터뷰 결과 정리는 AI한테 시키면 되지 않나요? 하루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는 일단 정리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사용자 인터뷰 결과를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녹취록을 요약하는 일이 아니다. 인터뷰마다 다른 맥락을 이해하고, 발언의 행간을 읽고,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고, 그게 실제 서비스에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는 일이다. 어떤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불편하다'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이 서비스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 차이를 읽어내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AI가 텍스트를 요약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해석은 사람이 해야 한다. 그 해석을 잘 하려면 인터뷰 현장에서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대화의 흐름을 경험하고,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있게 말하는 태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한 망설임, 참석자들간의 이해관계도 참고할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분석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내는 일은 하루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일을 '그거 별거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려면,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과거에 비슷한 일을 직접 경험했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대상이 변함으로써 일의 속성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대개는 현재의 담당자가 그 일을 가장 잘 안다고 믿어주는 것이 좋다. 모르면서 단정짓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례다.

 

 

 

출처 : point vanya

AI로 빠르게 해도 되는 일

AI가 잘하는 일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는 회의록의 초안을 AI에게 맡긴다. 세 시간짜리 회의를 녹취한 텍스트를 AI에게 넘기면, 주요 결정 사항과 액션 아이템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사람이 직접 하면 30분 걸릴 일을 3분 안에 해주고, 나는 회의록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지 검토만 하면 된다.

 

복잡한 계약서나 정책 문서를 쉬운 말로 풀어달라고 할 때도 AI는 유용하다. 이를테면 법률 용어가 가득한 문서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작업, 긴 보고서를 임원진에게 보고할 요약본의 초안으로 만드는 작업 같은 것들을 AI에게 맡기면 쉬워진다.

 

서비스 기획을 하다 보면 예외 케이스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혼자 생각하면 몇 가지가 나오는데, AI에게 예외 케이스를 제안해달라고 하면 훨씬 많은 경우의 수가 나온다. 다 대응할 것인지는 다른 주제이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까지, 이런 용도로 AI를 쓰면 퀄리티가 높아진다.

 

이런 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다른 형태로 가공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의 빈틈을 채워주는 일들이다. 결과물을 더 그럴듯하게, 더 촘촘하게 만들어주는 일들. 이런 작업에서 AI를 활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AI로 빠르게 하면 안 되는 일

반면 절대 빠르게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를 맞추는 일이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두 팀이 협업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초반부터 방향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달랐고, 그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결정자 중 한명이 이런 제안을 했다. '각자 AI로 요구사항 정리해서 공유하면 되지 않을까요? 빠르게 정리하고 넘어가죠.'

 

그래서 양쪽이 각자 AI로 요구사항을 정리했다. 문서는 빠르게 나왔고, 형식도 깔끔했다. 그런데 두 문서를 나란히 놓고 보니 방향이 다른 것이다. 같은 기능을 두고 한쪽은 사용자 편의를 중심에 놓았고, 다른쪽은 사업성을 중심에 놓았다. 이해의 방향이 다른 것은 빈번한 일이나,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를 자세히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결국 다시 긴 회의를 여러번 해야 했다. 처음부터 한두명에게 요구사항을 정리하도록 몰아주고, 이후에는 대화로 풀었으면 한번에 됐을 일이 세배로 늘어났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서비스 방향에 대해 계속 말이 바뀌는 프로젝트였다. 회의 때마다 조금씩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AI로 회의록 정리해서 결정사항 확정하면 되지 않나요?' 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클라이언트가 말을 바꾸는 게 단순한 변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고, 대화를 통해 천천히 정리되고 있는 중이었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그러하다. 여튼 그 과정을 문서로 확정해버리면 오히려 방향이 굳어버려서 나중에 더 큰 수정이 필요하게 된다.

 

저쪽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조율하는 과정,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 이건 AI로 뚝딱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대화를 나누고, 오해를 풀고, 다시 맞춰가는 과정. 이 과정 자체가 일의 본질인 경우가 있다. 그 과정을 생략하면 결과물은 나왔는데 이해는 맞춰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건 결국 더 큰 문제로 돌아온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

AI 덕분에 많은 일들이 빨라졌다. 그 자체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빨라졌다는 사실이, 모든 일을 빠르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빠른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특히 사람이 관계된 일에서는 더 그렇다.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오해를 푸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방향을 맞추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들을 AI로 줄이려고 하면, 줄어드는 건 시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다.

 

누군가의 일에 'AI 쓰면 금방 되잖아' 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디에 시간이 걸리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 왜 필요한지. 그걸 모르면서 속도를 말하는 건, 일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일을 무시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안다. 내 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일과 빠르게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일이 어느 쪽인지를 먼저 이해하려는 것. 그게 범위를 잡는 능력의 시작이고,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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