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과정을 생략한다

나는 AI가 뱉어낸 결과물을 스스로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AI가 등장하기 전이나 요즘도, 내가 쓴 기획서를 누군가와 리뷰할 때 기획 의도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 막혔던 적이 있는지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된 건 아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수영을 잘하고 싶으면 수영장에 가야 한다

AI 없이 혼자 끙끙 앉아서 뭔가를 만들다 보면, 고민한 흔적이 내 안에 남는다. 다음에 비슷한 작업을 할 때 바로바로 떠오르는 것들이 생긴다. 몸에 습관처럼 밴다고 해야 할까.

 

수영을 잘하고 싶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수영 잘하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을 아무리 많이 봐도, 수영장에서 직접 뺑뺑이를 몇 바퀴 더 도는 것만 못하다. 강사님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직접 해봐야만 몸에 익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획도 비슷하다. AI가 그럴듯한 구조를 만들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그 구조를 이해하고,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응용할 수 있으려면 그 과정을 직접 통과해야 한다. (AI를 포함해)남이 해준 결과물만 받아서는 그게 안 된다.

 

 

 

그래도 AI를 씁니다

물론 AI를 쓰면서 좋은 점도 있다. 나의 매일 업무 루틴은 클로드와 GPT를 열어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서비스 기획을 하다 보면 시스템의 예외 케이스를 설계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혼자 생각하면 몇 가지가 나오는데, AI에게 예외 케이스를 여러 개 제안해달라고 하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까지 쏟아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다음 작업이다. AI가 준 목록을 그대로 다 쓰면 안 된다. 현실적으로 대응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주요한 것만 추려야 한다. 이 선별 작업이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업계에서는 이걸 Human-in-the-loop 라고 부른다. AI가 양을 채워주고, 사람이 판단하는 작업.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엄청난 양이 쏟아진다. 그걸 읽는 것 자체도 꽤 피로한 작업이다. 사람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인풋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AI와 티키타카를 자주 하지 않는다. 주고받는 횟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쓸지를 내가 설계하는 것. AI를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연필을 들다

나는 AI를 쓰기 전에 먼저 연필을 들고 빈 노트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그걸 바탕으로 AI에게 건네면서 묻는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이 순서가 중요하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AI에게 먼저 도움을 청하면, AI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이야기가 한번 그쪽으로 흘러가버리면 다른 가능성들은 놓치기 쉽다. 초기 방향은 사람이 먼저 잡아야 한다. AI는 그 이후에 들어오는 게 맞다고 본다.

 

내가 AI에게 주로 맡기는 작업은 세 가지다. 내 생각을 정리한 후 놓친 게 없는지 확인하는 것, 다른 가능성을 제안받는 것, 문서의 정합성을 기계적으로 체크하는 것. 초안의 방향을 잡거나 세밀하게 다듬는 작업은 내가 직접 하는 편이다.

 

 

 

무난한 성공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AI를 쓰면서 기획 속도가 빨라졌다. 단순 작업은 AI에게 맡기고, 나는 방향을 설계하거나 범위를 좁혀나가는 작업에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혼자 작업할 때의 이야기이다. AI가 작업 프로세스에 들어오면서 진행 속도가 더뎌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건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뤄보려고 한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작업 속도가 빨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줄어드는 것도 있다. 바로 고민하는 시간들, 그리고 실패하는 경험들이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치열하게 고민한 만큼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고민 없이 무난한 성공만 하다 보면 인사이트가 없다. 그걸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AI가 빠르게 채워주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내가 직접 채워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결국 AI가 생략하는 건 시간이 아닌 과정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내가 다음 번에 더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쌓이는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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