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기획을 합니다. 굳이 일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집에 친구를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냉장고를 살펴보는 일도 기획의 한 부분이고요. 약속장소에 가기 위해 집에서 언제 나와서 어떻게 갈지 계획하는 일도 기획의 한 부분입니다.
위의 예를 들어 볼까요? 집의 냉장고를 열어보며 현재 있는 식재료의 상태를 파악합니다. 친구의 음식 선호, 오늘의 날씨, 내일의 일정 같은 것들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친구는 점심에 샐러드를 먹었다는데, 저녁에는 샐러드만 아니면 좋다고 하네요. 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내일은 건강검진이 있는 날이네요. 그래서 따뜻하고 속이 편한 음식을 하려니, 냉장고에는 가공식품 뿐입니다. 장을 보러 나가거나 포장/배달주문을 준비해야겠네요. 이렇게 사건의 상황을 살피며 최적의 결정을 하는 일이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는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기획을 합니다. 기획은 '현상 파악 → 문제 정의 → 해결안 제시 → 해결' 의 사이클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냉장고를 보면서 현상을 파악하고, 현재 집에 먹을게 없다는 문제를 발견한 뒤, 장을 보고 오기로 하고, 장을 봐온 재료로 요리를 하는 거죠.
이 사이클을 많이 반복하며 고민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이 행위로 돈을 버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는 직업이 아닌 상태라고도 생각합니다. 이 행위로 돈을 벌고 있지 않다면, 그냥 직업으로서의 기획자가 아닌 것 뿐입니다.
직업으로서의 기획자
기획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나름의 기획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이는 기획이라는 일로 돈을 벌고 있다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산업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차별점이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으며,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된다고 느낍니다.
다른 직업도 아닌 기획자가 특히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기획자란 선택을 설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능을 넣을지, 무엇을 덜어낼지, 어디에 자원을 쓸지 결정하는 일은 모두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택은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기획은 '돈을 쓸 것이냐?, '돈을 쓰지 않을 것이냐?' 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돈이 오가는 곳에는 시스템이 생기고, 시스템은 규칙으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규칙이 아닌 문맥으로 이해합니다. 시스템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야말로 기획자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획자는 시스템과 사람 사이에서 맥락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지 같은 질문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결국 기획이란 시스템, 즉 기능을 설계하는 일이 아니라 가치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에 기획자라면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기획 철학
저에게도 몇가지 기획 철학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이 포스트에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여러번 쓸 수 있는 플랫폼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꺼내 보겠습니다.
1. 처음 접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이것이 제 기획의 대원칙입니다.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기획자는 중간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통역 일을 전문적으로 해보진 않았지만, 어찌보면 통역사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의 제작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제가 몸담고 있는 IT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개발자들이 제품을 제작하는데요. 이 개발자들의 전문 용어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IT 기획자들은 개발자들의 언어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변환해서 일반인과 대화하고, 일반인의 언어를 개발자들이 잡아채서 바로 작업 규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해 전문 언어로 변환해 개발자에게 설명하는 일을 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다면, 반대쪽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이 대원칙은 제 기획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보통 사람은 글보다는 그림, 그림보다는 영상을 보고 잘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획서를 설명할 때 그림 위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글을 읽고 쓰기를 좋아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기 귀찮아하고,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글로 정리한 후에야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죠. 글로 정리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적어 보겠습니다.
겸손의 자세도 필요합니다. 내가 아는 만큼 다 꺼내면, 상대방은 지쳐버립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할 줄 아는 능력도 갖게 되고요. 이 대원칙으로 삶의 태도를 정할 수도 있습니다.
2. 하루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3년을 개발자로, 6년을 기획자로 살다보니 꽤 오랜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고객사에서, 집에서, 내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일해 봤습니다. 출퇴근이 정해진 회사에서 일해보기도 하고, 유연근무나 재택근무 형태의 회사에서 일해보기도 하고, 내 시간을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형태로 일해보기도 했습니다. 잠도 못자게 바빠서 60시간 넘게 일한 적도 있고, 열흘동안 컴퓨터 앞에도 앉아있지 않은 날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 업무 패턴을 찾았고, 기획 철학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로 깊이 집중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럴 때면 마치 이 우주에 저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소리는 사라지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상태는 길어야 두 시간 남짓입니다. 짧으면 20분 정도로 끝나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잠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물을 마시거나, 쓸데없는 영상을 보거나,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다시 집중의 문이 열립니다. 이 순간을 '신의 부름' 으로 불러도 재밌겠네요.
하루에 그런 시간이 허락되는 건 많아야 여섯 시간쯤인 것 같습니다.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그 시간이 모두 집중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집중하지 않는 시간이 있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존재합니다. 집중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몰입의 순간만큼은 어딘가에서 허락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이라는 정신노동은 꼭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더군요. 샤워를 하다가도, 출퇴근길에서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일이 이어집니다. 생각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집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컴퓨터 앞이 아닌 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문득 떠오르면,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느낌이 듭니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걸려 있는 상태랄까요. 생각은 흘러가지만, 마무리되지 못한 채 계속 맴돕니다.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몰입하는 시간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붙잡아 구체화하고, 흩어진 조각들을 구조로 엮어내는 일은 의식적인 집중 속에서 더 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정돈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집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잘 쉬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얘기하면 길어질까봐 언급만 합니다만, 이 주제는 프로젝트나 제품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내가 기획하는 제품은 누군가에게 집중해 만들어진 결과여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모두를 타겟한 제품은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건도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3. 돈이 돼야 한다.
혹시 직업의 3요소가 어딘가에 정의돼 있나요? 제가 생각하는 직업의 3요소는 '역량, 흥미, 돈' 입니다. '얼마나 잘하는가, 얼마나 즐거운가, 얼마를 버는가' 가 기준이 됩니다. 이 3요소 중에서 두개 이상 충족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하진 못해도 재밌고 잘 벌리면 할만한 직업인 것 같구요. 잘 하고 잘 벌면 그닥 즐겁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잘하고 즐거운데 돈이 잘 안벌리면 더 오래 해보거나 다른일을 병행하면 되잖아요.
사실 이 셋은 연결돼 있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나에게 돈을 주고요, 돈이 많아지면 즐거워요. 내가 잘하는 일로 남에게 돈을 벌어다 주면 나도 좋고 남도 좋습니다. 너무 염세적이어서 의미가 왜곡될까봐 좀 걱정되지만, 이중에서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손해를 보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돈은 그 손해와 이익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돈은 솔직합니다. 누군가가 기꺼이 지불했다는 것은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획이라는 일은 과정과 결과가 추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좋은 기획이었는가?'라는 질문은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되었다면,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유효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저는 그 점에서 돈을 하나의 피드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좋은 피드백입니다. 이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굳이 돈이 아니라도, 피드백을 수치화하는 것은 꽤 좋은 방법입니다. 저는 이런 가치관 때문에 아주 애매한 것이라도 수치화하고, 모호할지라도 적당한 틀을 갖추고 시작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물론 돈이나 수치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 빠진 기획은 책임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돈이 오가는 순간, 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기에 깊은 기획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기획을 얘기할 때, 결국 돈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을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삼는다면 더욱이요.
'이 일을 왜 해야 할까?' 에 대해서 생각해 본 과정을 글로 담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내용이나, 여기 담기에는 결이 다른 이야기는 다른 글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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