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ll] 노하우

이상한 기획서를 받은 날

제나로Genaro 2026. 5. 28. 17:22

AI로 작성된 기획서를 받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문서를 작업자가 검수했는지, AI에게 맡긴 그대로인지, 나는 알 수 있다. AI가 작성한 문서의 형식은 대체로 완벽하다. 목차가 있고, 항목마다 설명이 붙어있고, 표도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잘 준비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문서들은 읽을수록 뭔가 이상하다.

 

나는 1인 사업가이자 프리랜서로 생계를 꾸려가며 주로 외주 기획자로 일한다. 어떤 팀이 어딘가에 무언가를 만들어 납품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획자가 필요할 때 내가 들어가는 구조다. 이때 내 클라이언트는 대개 시간에 쫓기고 있다. 보여줄 게 필요하고, 빨리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기획서 없이 바로 개발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그러다 길을 잃어 뒤늦게라도 방향을 잡고 싶어서 기획이 필요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I로 만든 기획서라도 있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클라이언트 측에서 AI로 기획서 초안을 써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나도 매일 AI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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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성 없는 완벽함

 어느날 받은 문서는 게임 아이템 거래 플랫폼 기획서였다. 핵심 목표를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개발사의 수익성 증대, 유저 1인당 평생 가치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수익성을 증대하려면 어떻게? 어떤 과금 구조로? 어디에 팔 건데? 분기 목표는? 이 서비스를 실제로 쓸 유저는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이 아이템을 거래할 때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기획서에는 구현하고 싶은 기능 목록이 아주 길었다. 그런데 그게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기능이 어느 맥락에서 사용되는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냥 단순한 나열이었다. 형식은 완벽한데, 현실감이 하나도 없다.

 

 

출처 : Architectural Digest

어디까지 생각해 보셨나요

이런 경우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린다.

 

"아이템 거래를 하는 유저는 주로 어떤 상황에서 이걸 쓸 것 같으세요?"

"이 서비스의 주요 수익 모델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이 기능들 중에서 첫 번째 버전에 꼭 들어가야 하는 건 어떤 건가요?"

 

물론 이런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면 안 된다. 클라이언트의 사고 흐름을 잡아주면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규모의 질문을 던진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처음 드린 기획서에 적혀 있는 대로인데, 꼭 그렇게 안 해도 돼요"이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기획서는 클라이언트가 골똘히 생각한 결과물이 아니다. AI가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문서를 검토 없이 가져온 것에 가깝다. 그래서 그 다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기획자만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히 준비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AI가 없던 시절에는 클라이언트에게 메모장에 적은 아이디어라도 좋으니 당신이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담겨 있는 자료를 달라고 했다. 그게 오히려 그 사람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를 파악하는 데 훨씬 빠른 길이었다.

 

지금은 그 반대가 됐다. AI가 만들어준,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문서가 오히려 일의 진행을 막는다. 클라이언트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럴듯한 문서가 이미 있으니 다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그 문서를 일단 읽긴 하되 옆에 치워둔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다.

 

"이걸 왜 만들고 싶으세요?"

 

AI는 너무 완벽한 형식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 형식 안에 담길 생각은 사람이 해야 한다. 그 생각을 AI에게 맡겨버리면, 작업은 완성됐는데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내가 요즘 가장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다.